시대정신/시대정신(시민광장)

작금의 촛불이 조중동의 폐해를 국민에게 알리는 기회가 되기를....

goback01 2008. 6. 22. 17:46

촛불의 목표는 조중동이다.

/ karangbi

 

 

촛불집회가 한창이다.

 

이런 생각을 해본다. 20년이 흐른 후 사람들은, 역사가들은 2008년 늦봄 초여름을 뜨겁게 달군 금번 촛불운동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지을까. 과거 6월항쟁의 연장선상에서 ‘민주화운동’ 혹은 ‘민주혁명’으로 명명지을지, 아니면 그 어떤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될지. 또 이번 촛불운동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우리들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하다.

 

21년전 6월에는 그랬다.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수 있게 되면 만사 OK일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한 우리 국민들의 바람대로 헌법이 고쳐졌고 그 헌법에 따라 지난 다섯 차례의 대통령선거에서 큰 무리 없이 국가권력의 수직적/수평적 교체를 이루면서 우리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한걸음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또다시 촛불을 들고 수만 수십만의 사람들이 도심의 밤거리에 모이고 있는 것일까.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서 다수 국민들의 뜻에 따라 권력이 만들어지는 오늘의 시점에서 왜 그와 같은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난 것일까.

 

국민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선거과정에서 반영되었을 것이고 그 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권력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약속한대로 국가정책을 결정하면 될 터인데 왜 이와 같은 길거리 시위를 통해서 당면한 국민적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일까. 우리들은...

 

무엇인가 우리들의 민주주의에 심각한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 결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 <조선일보> 6월 9일자 1면 "쇠파이프 등장"

 

바로 문제는 조중동(조선 중앙 동아 등 보수신문을 뭉뚱그려서 부르는 말)이다.

 

신문시장의 75% 이상을 과점하고 있는 그들 보수신문이 합리적 여론형성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여론형성에 있어서 동맥경화가 발생하고 그 동맥경화가 극에 달할 때에는 오늘과 같은 심각한 민심폭발로 이어지는 것이다.

 

흐르는 물길에 그 물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다면 흐름을 멈추고 물높이를 증가시키다가 언젠가는 그 장애물을 너머서 격류를 일으키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이다. 때문에 여론의 격류를 만들지 않으려면 소통의 장애물을 없애는 것이 상식이다.

 

6월항쟁을 통해서 절차적/정치적 민주주의가 완성된 것이 사실이고 기성언론들의 여론형성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있었다면 그 후의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비롯한 모든 이슈들의 해결책은 물 흐르듯이 여론의 추이에 따라 결정되었을 것이다.

 

이명박이든, 노무현이든, 김대중이든, 김영삼이든, 노태우든 사회적 공론에 따라 형성된 여론에 대적할 수는 없었을 것이며, 그에 따라 우리 사회는 어제보다는 오늘이 그리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발전된 인간다운 사회로 변모하였을 것임은 불문가지(不問可知)라 하겠다. 특정 정치지도자나 집권정당에 따라 국가가 직면한 문제들을 바라보는 눈에 있어서 미시적인 차이점은 있었을 지언정 큰 물줄기를 바꾸지는 못하였을 것이라는 뜻이다.

 

불행히도 우리 국민들은 그런 정상적인 언론을 가지지 못했다. 이름하여 ‘조중동’이다. 물론 민주사회는 다원성을 전제로 한다. 극우적 시각을 가진 언론도 필요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비율이 아닐까. 언론시장의 75%를 같은 논조의 극우적 시각을 가진 신문사가 장악하는 사회는 정상적인 여론형성이 불가능하다.

 

그들 조중동은 독자들의 이익 보다는 광고주의 이익을, 우리사회 기득권층의 이익을 생각하며 기사를 쓰고 사설과 칼럼을 작성한다. ‘소비자는 왕’이라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어떻게 그와 같은 반시장적인 일들이 가능했을까.

 

무릇 신문이란 ‘뉴스’라는 정보를 파는 장사이다.

 

따라서 좋은 신문이란 독자인 나의 이익, 내가 속한 사회의 이익, 나아가 국가와 인류의 이익에 부합하는 기사와 사설을 쓰는 신문일 것이다.

 

그런데 조중동은 그러지 못했다. 그들 조중동은 찌라시나 다름없는 값싼 가격과 부수적인 경품으로 독자를 만나려 했고 그에 혹한 독자들은 그들 신문사의 시장점유율을 75%로 높여 주였다. 그 75%의 시장점유율에 의해서 조중동 기사는 75%의 여론이 되었고 그 폐해는 온전히 국민독자의 몫이 되었다.

 

그러면 조중동은 땅 파서 장사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바로 그들의 물주 광고주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조중동에게는 두 고객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독자이고 다른 하나는 광고주인 것이다. 물론 여타의 신문들 또한 광고주와 독자라는 두 고객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것이니 그것이 조중동에게만 특별한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조중동에게 있어서 독자들은 여타의 신문독자들에 비해서 특별한 구석이 있다. 즉, 물건(신문)을 사주는 고객이라기 보다는 헐값(값싼 신문가격과 경품)에 영향력을 내다파는 대상으로서의 의미가 더 강한 셈이다. 그렇게 하여 사들인 영향력을 가지고 그들의 진정한 고객이라고 할 수 있는 광고주들로부터 회사 수입의 대부분을 충당하는 것이 이른바 조중동의 장사현황이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조중동에 있어서 눈치를 봐야할 대상은 독자가 아니라 광고주이고 따라서 기사나 사설의 논조 또한 광고주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결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중동 독자의 이익과 조중동 광고주의 이익은 같을까. 그 답은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들께서 나름대로 생각해 보시라.

 

이번 광우병 파동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만일 조중동이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광우병 문제를 대했다면 이명박 정부가 그런 어처구니 없는 협정을 했을 리가 없다. 그들 조중동은 철저히 삼성 현대 등 광고주의 입장에서 그 사안을 다뤘다. 물론 그 광고주의 입장이라는 것은 이명박 정부의 입장과도 같았다.

 

하지만 만일 조중동이 여타의 신문이나 국민여론의 입장에서 기사를 썼다면 이명박 정부도 맘대로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아무리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부라 할 지라도 그 비즈니스(기업)를 위해서 권력을 내던질 바보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조중동의 신문시장 점유율이 75%가 아니었다고 하면 그들이 어떤 입장에서 글질을 했던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만악의 근원은 조중동의 신문시장 점유율이 75%라는데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촛불운동의 목표는 뚜렷해진다.

 

▲ 조중동폐간 국민캠페인 바로가기(클릭)


그 개조의 대상은 바로 조중동이다. 이명박 정부와 조중동을 모두 개조시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되지만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면 나는 조중동이다.

 

성과도 있다. 조중동 광고주들을 겨냥한 시민들의 싸움이 힘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다음 아고라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는 조중동 광고주 압박운동으로 그들이 흔들리고 있다.

 

그 단적인 증거가 조선일보의 대표논객 김대중 고문의 글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6월 8일자 “촛불시위 vs 1인시위”라는 글에서 “조선일보에, 그리고 조선일보 광고주들을 상대로 다른 견해를 갖지 말라고, 아니 가져서는 안 된다며 불매운동으로 강압하는 것은 또 다른 독재현상이다.”라고 푸념을 늘어놓고 있다.

 

조중동 반대 네티즌의 힘이 대단한 것임을 자복하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정말 만일 조선일보의 신문시장 점유율을 5% 아래로 끌어 내릴 수 있다면 우리들은 더 이상 촛불을 들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